우려했던 것과 달리, 제주에 태풍은 첫 날 밤사이에 지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애월 쪽은 비가 그렇게 심했던 것 같지도 않았고.
막상 괜찮은 컨디션으로 눈을 뜨니, 전 날 몸 상태만 좋았다면 돌아다닐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는 9시쯤 일어나 느릿느릿 준비를 하며 전날 사온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었다.
출근할 때는 1시간도 채 안걸리는 준비 시간이,
여유를 부리니 3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결국 한 것도 딱히 없는데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어기적거리며 숙소를 나섰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지;)
태풍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날이 흐리고 비바람이 강하다길래, 하루종일 카페에서 요양하다가
제주에서 재택 근무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을 요량이었다.
삼영식당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일주서로 6748
매일 08:00~20:00
둘째주, 넷째주 일요일 휴무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일단은 국밥집.
이곳 몸국을지인이 강력추천을 하길래, 사실 몸국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시도해봤다.
그런데 웬걸.
내가 먹었던 몸국이 그저그랬던 건지, 이 곳 몸국이 전설의 레전드인 것인지 엄청 맛있다!
안에 선지와 돼지고기도 들어가서 그런 것 같은데.
정말 진하고 너무 맛있었다.. 이걸 쓰는 순간에도 또 먹고싶어지는 맛.
실은 나의 위생기준에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는 식당이지만(나의 기준: 식당에 딸린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지), 이 정도 맛이라면 기꺼이.
제주도에 오면 고정적으로 가는 국밥집은 산방산의 중앙식당이 유일했는데, 애월에도 하나 생겨서 기쁘다.
까미노
제주 제주시 애월읍 고하상로 91-12 까미노
매일 10:30 - 20:00
관광지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동네 카페도 아닌 적절한 카페를 찾는다.
'적절한 카페'의 조건은 훌륭한 뷰와 괜찮은 커피 맛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전망과 커피 맛은 관광지로서 성공하기에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참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렇게 선택된 카페 <까미노>.
탁 트인 제주의 뷰를 보고 앉아있으면 그냥 이유없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인간의 심리란 원래 이렇게 자연과 밀접해 있는 것일까.
그냥 녹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 풀리다니.
그러나 인간의 악함 때문일까.
그 악함 때문에 타락해버린 인간은 더이상 자연과 함께 살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자연으로 돌아가기엔 포기해야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몸과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과 단절된 채 도심에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삶은 끔찍하다.
그렇다고 이미 도심에 구축해버린 나의 삶을 다 집어던지고 귀촌을 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 주기적으로 와서 숨을 쉬어주는 수 밖에.
약 1년여만에 제주에 오니 새록새록 ‘그래, 이 맛이지’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제주에서 좋아하는 것들.
1. 운전하는 나. 목적지가 생기면 내비를 찍고, 쿨하게 운전대를 잡고 떠나는 나.
그러나 현실은 문득 운전이 무서워지거나 갈길이 멀면 급 불안 초조해지곤 한다.
2. 제주 특유의 색감들. 나는 의외로 바다보다는 제주의 녹지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검정 돌담, 초록 밭, 감귤 나무, 이런 것들을 보면 마음이 말랑해지는 기분이다.
3. 숙소에 들어와 있는 시간. 왜 서울에서 집 안에만 가만히 있는건 그렇게 허망하고 무료한데 제주 숙소에서의 시간은 그렇지 않을까. 단지 숙소가 좋아서만은 아닌 것 같다. 일단 기본적으로 이불이 보송해서 그런것같아, 이불 빨래를 주기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빨리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4. 그리고 이렇게 그냥 카페에서 앉아있는 시간. 무언가를 딱히 하지 않아도, 잔뜩 가져온 책을 한 두장 읽고 덮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눈만 들면 보이는 녹지가 그냥 다 위로해주는 기분.
생각보다 별거 없다. 그래서 간혹 이 별거 없는 걸 하기 위해 이렇게 돈과 시간을 들여서 오는 건가,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어쩌겠나. 내 취향은 이렇게 시시하다면 시시한, 단조로운 것인 것을.
나는 그냥, 어쩔 수 없지만,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인 것이다.
유명한 고깃집을 가기위해 제주에서 재택 근무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혼여행의 단점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제한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저녁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낮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면서도 저녁에는 외로움도 씻어내면서 맛집도 가고 완벼크한 마무리..
우리가 가려던 곳은 유명한 곳이라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웨이팅이 있어서 우리는 맞은편 베스킨라빈스에서 기다렸다.
육고깃집
insta@jeju_meat
제주 제주시 한림읍 한림중앙로 34
매일 17:00 - 23:00
휴무 인스타그램 공지
드디어 입성한 육고깃집
제일 유명한 돼지뼈갈비세트를 주문하고,
육사시미도 너무 먹고싶어서 좀 많긴하지만 결국 시켜버렸다.
여행이니까~ 거의 가불기급.
육사시미는 내 기억에는 아마도 처음 먹어보는데, 정말 맛있었다.
이따금씩 신선한 날고기를 마주할 때면 '이상태로 굽기 전에 먹으면 무슨 맛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기곤 했었는데
그렇게 상상해본 맛 그대로랄까.
탱글탱글한 식감에 고소하고 싱싱한 맛인데 전혀 비리지 않았다.
뼈갈비의 고기 질도 좋고 맛있었지만, 나는 육사시미가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사실 육사시미 먹느라 뼈갈비를 먹을 때쯤엔 이미 배가 어느정도 차서 그럴수도..) 그리고 개인적으로 뼈갈비보다는 조금 더 기름진게 좋음
함께 식사를 한 친구랑 단둘이서 만나는건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여럿이서 만났을 때와 일대일로 만났을 때 대화의 밀도는 확연히 달라지는 것 같다.
여럿이서 있을 때도 아주 못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굳이 꺼내지도 않았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제주에서의 저녁을 보냈다.
제주에 있는 내내 혼자 다녔다면 조금 외로웠을 것 같은데
함께 회포를 풀 친구가 있음에 감사하며
9시에 아쉽게 마무리.
(코로나 ㅂㄷㅂㄷ)
이제는 밤이면 전혀 덥지 않다.
올해 유행어였던 '여름이었다'가 진짜가 되었다.
유난히 길고 힘들었던 올 여름.
그래서 저런 유행어가 생긴 걸지도.
힘들었던 여름 날도 지나고 숨통이 트이는 계절이 왔다.
잘 견뎌냈다, 나 자신.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줘야겠다.
항상 자신에게 가혹했기에 따뜻한 말, 좋은 시선을 주지 못했지만, 그렇지만,
사실은 돌아보면 나는 그동안 열심히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
결과는 아무래도 괜찮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 또 한 계절을 지나왔을 뿐.
이 계절도 고생했어, 나 자신.
그렇게,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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